4년간의 뉴욕 생활: 마무리를 지으며

정신 없이 달려온 내 20대의 기억들

Hokyoon Woo
8 min readNov 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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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standing near white wall photo
Photo by Zac Ong on Unsplash

평생 뉴요커로 지낼 것만 같았던 내가 이렇게 서울로 돌아올 줄 몰랐다. 서울에 있는 것이 아직도 가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글로나마 정리를 해야 뭔가 매듭짓는 다는 느낌이 들어, 책상 앞에 앉았다. 날 알고 있는 사람들, 또 날 만날 사람들이 궁금해 할만한 나의 시시콜콜한 뉴욕 생활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을 여기에 나열해 보았다. 두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다.

롱아일랜드

처음 살았던 동네는 Stony Brook, NY —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작은 동네 — 인데, Stony Brook University에 입학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캠퍼스 밖으로 나가면, 정말 아무것도 없고 가까운 마트를 가고 싶다면 차나 대중교통(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Stimson 기숙사에서 1년을 지내고, 새로 신축된 Tubman Hall에서 1년을 지냈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만족할 만한 학점을 얻지는 못했다. 여러 핑계를 댈 수 있겠지만, 터 놓고 말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미국에 왔다는 기분에 놀고도 싶었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후회가 남았다. 결과적으로는 “오기 잘했다”는 생각. 밤잠 설쳐가며 미국 학생들과 프로그래밍도 해보았고, 미국 대학 분위기, 대학 문화등을 경험했다. 나이가 차서(?) 갓 입학한 미국 신입생들과 노는 그런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아마 못했을 경험들이다.

또, 기숙사에 살면서 짜증났던 것들— 화재 경보기가 한밤 중에 울려서 자다 깨 밖으로 나오거나, 새벽에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나 조용히 하라고 소리친 경험, 그리고 부끄럽지만 깜박하고 봉(bong)을 기숙사에 두고 나왔다가, room inspection에 걸렸던 경험들 — 지금은 모두 좋은 추억이 되었다. 졸업을 cum laude로 했지만, 대학원은 지원하지 않았다. 학점 4.0 만점을 가지고도 지원했던 대학원에 다 떨어진 동기가 있어 심적으로 “쫄았다” 는 것도 있겠지만, 이 때의 나는 더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뉴욕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것도 Software Engineer로. 인터뷰를 진행했던 회사들 (구글도 있었다!)에서 졸업 전후로 다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문제는 역시나 코딩 문제풀이 능력. 단순히 CS 수업을 잘 듣고 성적을 잘 받은 것 가지고는 회사들이 풀어보라는 코딩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려웠다. 방학 때 Leetcode를 많이 풀어볼 껄 하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2주 가량을 다른 기숙사, West Apartment에 지내다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라는 생각에 퀸즈로 넘어갔다.

Queens (퀸스)

구글에는 “퀸스” 라고 나온다. 발음상 퀸즈라고 쓴다. Queens내 Woodside라는 동네에 살았다. 한국인 룸메이트 2명과 쓰리베드 콘도에서 지냈다. 월세는 850정도로 기억한다. 스토니브룩에서 같이 졸업한 동기형이 Woodside로 간다고 해서 따라왔지만, 같이 살지는 않았다. 내가 너무 늦게 이사를 간 것도 있고, 또 콘도나 오피스텔 같은 편의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집에서 살아야 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이때 이사를 도와준 Brijesh — 막학기 팀프로젝트를 같이하며 친해진 인도계 미국인 친구 — 가 콘도가 좋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집 주변엔 24시간 하는 K-mart를 비롯해서 한국 사장님이 계신 세탁소까지, 여러 편의시설들이 많았다.

한 달여간을 여러 회사에 지원하며 보냈다. 이 때 당시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여러 군데에서 연락을 받긴 했다. 굉장히 작은 회사들에게서 연락이 와, 나에게 일단 사이트를 만들어 달라고 하며 결과가 좋으면 오퍼를 주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Okay Okay” 하였지만 쌔한느낌이 들어 진행하지 않았다. F1 비자로 있을 수 있는 기간이 하루 하루 지나가고 있을 무렵에 학교 연계형 취업 지원 사이트인 Handshake에서 지원했던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전화로 “Python에서 Dictionary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봐서 “Key-Value pair를 가지는 Map형 자료구조”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다음 주에 맨하튼 오피스로 인터뷰 보러 오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난 직후, 나는 바로 오퍼를 받았다. 굉장히 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나에게 얼마를 원하냐고 해서 순진하게도 5만이면 좋을 거 같다고 했더니, 6만을 제시 받았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오피스를 나왔다. 나와서 몇 걸음 걷자마자 “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상해보면, 너무 떨렸던 나머지 방어기제가 작용하여 시간을 달라고 말했던 것 같다. 동기형에게 전화하여 오퍼를 받았으나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바로 이메일 보내서 accept 하겠다고 의사표현을 하라고 조언을 받았다. 집에 가는 길에 핸드폰을 열어 회사 담당자에게 오퍼를 수락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담당자는 “I am confused..”로 시작했지만 “Okay, you can start from July” 라고 끝을 맺었다. 나의 맨하튼 — 시티라이프의 시작이었다.

Manhattan, 진짜 뉴욕(?!)

2018년도 7월부터 미드타운 맨하튼 36가에 위치한 오피스로 출근하였다. 당시 회사 직원은 창업자 2명과 엔지니어 3명 (나포함) 그리고 비서 1명. 비서 분이 나에게 처음 인사했는데, 엄청 당황하고 떨면서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분 퇴사할 때까지 계속 어사..로 지냄). 초반에 9시 반 출근, 6시 반 퇴근이라는 이야기를 해서 일을 다 못해도 퇴근해도 되는 줄 알고 계속 집에 갔다. 그랬더니 창업자 겸 매니저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일 다 끝내지 못했으면, 집에 가서 마무리를 짓던지, 오피스에서 끝까지 하고 가라고 하였다.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포커페이스로…) 오케이, 오케이 한 기억이 난다.

그 후엔 나에게 할당된 업무들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였다. 가장 늦게 퇴근한 적도 있고, 퇴근하고 나서도 길 건너편 스타벅스로 가서 디카페인 라떼 시켜놓고 코드를 찍고.. 나름 열심히 하였다. 대충 계산하면 오피스에서 10시간 하고, 또 집가서 2~3시간 하고, 이랬던 것 같다. 맨하튼에 있으면서 일만 하고 유흥을 전혀 즐기지 못했다..하하.. 나중에 여유가 생겨서 회사 오피스 맞은편에 위치한 킥복싱 체육관에 등록하고, 회사 끝나면 가서 운동하고 그랬다. 맨하튼으로 출근을 시작했을 때 그렸던 내 모습은 “뉴요커들이랑 재즈바가서 칵테일 한 잔"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며 하하호호 웃는 모습이였는데, 막상 나는 셔츠에 배바지, 벨트하고 맥북 앞에 앉아서 하루 종일 코드를 찍었다.. 뉴요커 친구 대신에 코드 빠르게 읽고 쓰는 법(?)을 얻었다.

맨하튼에서 일하는 학교 선배 형들 하고도 이때 많이 친해져서,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는 팁 같은 것들을 많이 들었다. 이때는 내가 연봉에 대한 불만이 많아서 형들만 만나면 불평불만을 쏟아내고…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위에 쓴 것처럼 열심히 회사일 했더니, 창업자 (나한테 집 빨리 가지말라고 했던..)가 또 따로 불러서 내가 extremely talented하다고 하며 연봉 만오천불 정도 올려줬다. 뭔가 회사에서 인정 받고 있다는 느낌, 내가 점점 더 발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이러면서 너무 회사 업무만 하지 않고, 뮤지엄도 가보고 콘서트도 가보고, 주말에는 클럽이나 바에도 가보고 하였다. 여러 밋업에도 나가서 사교도 해보고 하였다. 첫 출근 한지 1년 하고 2개월 지났나, 연봉은 다시금 2만불 올랐다.

하지만 점점 CSS만 하는 것 같고, 내가 원했던 Server-side 프로그래밍이나 Machine Learning 쪽의 업무는 거의 보질 못했다. 이때부터 슬슬 새로운 걸 배우기 힘들어졌다. 내 성격상 사람들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지만, 같은 팀에 있었던 중국인 엔지니어하고는 마찰이 있었다. “내가 이런 애(..!)하고 일하려고 그렇게 공부를 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본적인 프로그래밍 개념이 부족했다.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나에게 사소한 것 하나 다 물어봐서 (심지어 월급 명세서 가지고 세금 작성하는 법을 나에게 물어봤다…) 매니저에게 가 이야기 했더니 걔 똑똑하다고, 기다려보라고 했다. 사실 지금에서 생각해도 똑똑한 엔지니어는 아니란 생각.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기본기가 잡혀지니, 업무 해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후에 퇴사 한다고 했을 때, 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와서 고마웠다고 이야기했다. 후에 둘 다 더 좋은 위치에서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느새 2019년의 끝. 1년 5개월 남짓 회사에 있으면서, 두 명이 lay off 되는 걸 보았다. 두 명 다 나랑 말이 잘 통했었는데, 둘 다 없어지니 허전함을 자주 느꼈다. 이러면서 회사 다니는 것이 부쩍 재미가 없어졌다.

Jersey City — Metro에서 PATH로

일을 시작한 지 정확히 1년 되던 날에, 나는 퀸즈에서 저지시티로 이사를 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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